이해 엇갈린 사안, 기자들은 어떻게 쓰나(객관보도) -공선옥의 『꽃피는 시절』

객관성 상실에 분노하는 영희


   “이 기사 보셨어요?”

   신문을 내밀어 보였다.

   기사의 제목은 ‘순양석재 해법의 그날은 언제?’였다. 그런데 그 아래 소제목이 ‘막무가내 주민, 선량한 기업 발목 잡아’였다.

   ...(중략)...

   영희는 기사를 차마 끝가지 읽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문장력이 좋은 건 아니지만, 문장도 조악할뿐더러, 언론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양식인 공정성이라곤 아예 없는, 기사의 탈을 쓴 업체 편들기에 불과한 글이었다. 언젠가부터 고질이 된 두통이 띠잉, 하고 몰려왔다(공선옥, 2011, 187-188쪽).


   위의 글은 시골마을 유정면에 들어선 쇄석공장에 반대하는 할머니들의 ‘투쟁’을 그린 공선옥씨의 장편소설 『꽃 같은 시절』의 한 대목입니다(공선옥의 소설 『꽃 같은 시절』에 대한 설명은 이미 앞의 글에서 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생략합니다). 이영희가 유정면 할머니들의 투쟁을 다룬 지역 신문의 기사를 보고 분노하는 장면이죠. 즉 최소한의 객관성이나 공정성도 없고 노골적인 기업 편들기를 한 기사라고 지적합니다. 도대체 영희는 왜 분노한 것일까요? 그가 분노한, 소설 속의 지역신문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막무가내식 싸움으로 피해는 결국 주민들에게 돌아갈 공산이 커졌다. 유정면 쇄석기 설치반대 대책위의 군청 앞 시위와 농성이 한판가 몰려오는 겨울까지 계속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경찰은 이 시위의 실질적 리더로 지목한 이모씨, 그리고 최근에 합류한 서모씨가 환경단체나 각종 매스컴과의 연계를 주도한다고 파악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순양경찰과 뜻있는 인사들은 대책위의 막무가내식 좌충우돌식 투쟁방식에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한 전문가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업체에 대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대책위는 이미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행위를 하고 있고, 시위 선동자들이 나중 일은 생각지 않고 끝까지 대결구도로만 몰아가면 결국 피해는 순박한 주민들에게 돌아갈 것은 불은 보듯 뻔한 결과라고 말하고, 주민들에게 돌아갈 불이익을 조속히 알려야 할 의무를 가진 대책위가 고의로 그러한 사실을 고지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된다고 말했다(공선옥, 2011, 187-188쪽).


   소설 속 기사 요지는 유정면 할머니들의 투쟁이 이영희와 서해정이 배후에서 주도하면서 막무가내식 싸움으로 변질되고 있고,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면서 결과적으로 주민들만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이영희는 이 기사에 대해 최소한의 객관성, 공정성을 상실한 노골적인 기업 편들기 기사라고 분노하는데, 이영희가 생각한 기사와 저널리즘은 최소한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가진 객관보도, 객관주의 보도에 대한 요구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가 공선옥. 사진=창비 제공)



절망 주는 외눈박이 언론 


   그렇다면 이 기사가 과연 영희가 요구하는 객관보도, 객관주의 저널리즘의 원칙에 부합하는 것인지 살펴보기 전에, 근현대 저널리즘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현재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객관보도 또는 객관주의 저널리즘에 대해 먼저 알아보도록 해보죠.

   언론사에서 객관보도(objective reporting), 객관주의 저널리즘이 확립되기 전의 주요한 저널리즘 흐름은 정파적, 당파적, 상업적 저널리즘이었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입니다. 즉 객관보도, 객관주의 저널리즘은 19세기와 20세기 전반 미국 대중지들이 정당이나 거대 상인에 예속된 정파적 언론으로부터 자신을 구분하고자 시도하면서 태동하게 됐죠. 정파성과 상업성으로부터 분리되기 위해 객관성, 객관주의 저널리즘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객관성과 사실성을 강조하고, 인터뷰 기법이 발전됐으며, 우리가 잘 아는 역피라미드형 글쓰기 등이 핵심 요소로 발전했습니다. 이 같은 객관보도, 객관주의 저널리즘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저널리즘 현장에서 직업적 규범으로 자리잡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객관보도는, 비록 기자 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역사문화적 정치사회적 경제산업적 경험 등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기본적으로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을 최소화하고 진실을 추구하면서 편파적이지 않는 보도를 지향하는 보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유일상, 2004, 110쪽 참고).

   스테펜스(Stephens, M.)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객관보도, 객관주의 저널리즘을 위한 4가지 원칙 또는 규칙을 제시합니다. 첫째, 기자의 개인적인 선호가 기사에 명백하게 드러나서는 안되고, 둘째, 특정한 가치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용어(‘바보 같이’ ‘반동적’ 같은 말)의 사용을 피해야 하며, 셋째, 균형성(balance) 또는 공정성(fairness)을 객관성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고, 넷째, 기자는 정보의 ‘책임 있는 취재원’에 대한 논쟁을 유발한 가능성이 있는 주장에 대해 출처(attribution)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합니다(유일상, 2004, 109~110쪽 참고).


   객관성을 구성하는 요소로 사실성의 강조, 역피라미드형 글쓰기, 인터뷰 기법의 발전, 균형적인 글쓰기, 정파적 입장이나 사회적 갈등으로부터 초연함(detachment) 등이 제시되기도 했다(Mindich, 1998)

Mindich, D.T.Z(1998). just the facts: How 'objectivity' came to define American journalism.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이제 소설 속에서 이영희가 분노했던 기사를 스테펜스가 제시한 객관주의 저널리즘을 위한 4가지 원칙을 적용시켜 분석해 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기사는 객관주의 저널리즘에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첫째, 기사에는 기자의 개인적인 혹은 신문의 선호가 너무나 명백히 드러나고 있고, 둘째, ‘막무가내’ ‘좌충우돌’ 등 특정한 가치가 명백히 드러나는 용어가 사용됩니다. 셋째, 할머니들의 문제의식과 주장은 거의 볼 수 없는 등 균형성이나 공정성은 현저히 낮고, 넷째, 시위에 대한 비판 주장에 대한 출처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를 종합하면 객관보도의 요건을 거의 갖춰지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민웅은 2008년 봄과 여름 미국산 쇠고기 파동 당시 이념에 따라 특정 사실과 진실만을 일방적으로 보도하고 반대 주장이나 진실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했던 보수와 진보 언론을 싸잡아 ‘외눈박이 언론’(one-eyed journalism)이라고 불렀는데(이민웅, 2008, 7쪽),  소설 속 기사도 ‘외눈박이 언론’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아 보입니다.

   반면 아래의 사진에 제시된 보도는 최근 과학비즈니스벨트가 대전 대덕특구로 결정된 이후 이해관계가 엇갈린 대전과 충청권의 분위기를 전하는 기사인데, 전형적인 객관보도의 형식을 갖춘 기사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기자 개인이나 신문사의 선호를 드러내지 않고, 가치가 들어간 단어와 문장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균형성이 적절히 확보돼 있고, 출처도 명확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과학비즈니스벨트가 대전 대덕특구로 결정된 이후 이해관계가 엇갈린 대전과 충청권의 분위기를 전형적인 객관보도로 전한 『세계일보』 2011년 5월16일자 3면 기사)

 


객관주의와 검증보도에 대한 이중의 요청


   물론 현대 언론과 저널리즘 역사에서 객관보도 또한 적지 않은 문제와 한계 또한 드러나고 있습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사고, 범죄, 스캔들 등을 부각시키면서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와 조셉 퓰리처 등에 의해 이른바 황색 저널리즘으로 변이되기도 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서구 유럽 사회를 강타한 메카시즘 광풍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는 비판도 받게 됩니다. 이처럼 객관성이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광범위한 회의, 객관주의 저널리즘의 한계 등이 거론되면서 객관주의 저널리즘을 대체하려는 많은 저널리즘이 태동합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검증보도를 중심으로 한 탐사보도, 공공보도 등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저널리즘 첫째 의무는 진실 추구, 진실 보도이고 따라서 검증에 중점을 두자며 빌 코바치 등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널리즘 특유의 진실’(journalistic truth)은 또한 단순한 정확성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대중, 기삿거리가 되는 사람이나 사건, 그리고 기자와 최초의 기사 사이에 전개되는 분류의 과정이다. 공평무사한 진실 추구라는 저널리즘 첫 번째 원칙은 궁극적으로 다른 모든 형태의 커뮤니케이션과 저널리즘을 구분짓게 한다.”(Kovach & Rosenstiel, 2001/2003,  62쪽)


   문제는 한국의 현실, 소설 속 유정면과 이영희의 진실입니다. 탐사보도, 공공보도 등 새로운 저널리즘이 요구되는 저널리즘 현실과 함께, 아직도 정파성과 상업성 등에서 자유롭지 못한 소설 속 유정면과 이영희의 현실은 객관보도, 객관주의 저널리즘의 가치가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중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저널리즘의 요청과 함께 기존 객관주의 저널리즘의 가치 또한 여전히 필요한 것이 유정면의 진실인 것이죠. 한국신문윤리위원회가 제시하는 다음의 <신문윤리실천요강>(제3조1항)이 절절해지는 이유입니다. 


   “기자는 사실과 의견을 명확히 구분하여 보도기사를 작성해야 한다. 또한 기자는 편견이나 이기적 동기로 보도기사를 고르거나 작성해서는 안된다.”

 

<참고문헌>

공선옥(2011). 『꽃피는 시절』. 서울: 창비.

유일상(2004). 취재보도입문. 서울: 지식산업사.

이민웅(2008). 여는 글. 『저널리즘의 본질과 실천』. 파주: 나남.

Kovach, B. & Rosenstiel. T.(2001). The Elements of Journalism. 이종욱 역(2003). 『저널리즘의 기본 요소들』. 서울: 한국언론재단.

Posted by 김용출(KIM, YONG CH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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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시인의 사랑과 문인 편린-고은의 『상화시편』

   할 수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할 수 있었음에도 안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시 20대에 사랑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30대에도 사랑보다 허무가, 죽음이 먼저 왔다고 회고합니다. 시대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요, 자신의 삶의 굴곡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스무살의 사랑 내 것이 아니었다

소월이나 네루다의 것이었다

스무살도

서른살도

사랑보다

허무가

허무에 앞서

죽음이 내 것이었다


…(중략)… 


식민지 36년의 굶주림 끝

나 자신의 학대

분단 몇십년의 만취 끝

나 자신의 저주

사랑은 너무 늦게 내 몸에 박힌 화살들이었다(<지각> 중에서)


 시인 고은씨는 53년 문학인생 처음으로 펴낸 사랑시집 『상화 시편-행성의 사랑』에서 “여기 있어도/ 어디에 있나”라며 아내를 ‘명사도 동사도 아닌, 허사’라고 노래합니다. 창비 제공.

   노벨문학상 후보에 꾸준히 오르내리는 시인 고은(78)씨의 얘기입니다. 이런 고은 시인이 1953년 문학인생 처음으로 사랑시집 『상화 시편-행성의 사랑』(창비)을 펴냈습니다. 지난해 완간된 『만인보』(전 30권) 등 수많은 시를 써왔지만, 고은씨가 사랑을 정면으로 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생애 첫 연시집을 펴낸 이유를 그는 지난 7월6일 이렇게 밝혔습니다.

   “인류 보편적 가치인 사랑, 이것을 세상에 내보이는 만용(蠻勇)을 용기로 삼았습니다. 한 인간이 한 인간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받는 감동을 억제할 수 없어 이렇게 됐어요.”

    고은 시인은 이날 서울 무교동 한 식당에서 막걸리를 한 잔 걸친 뒤 기자들에게 “아내와 한 30년 살면서 사소한 일상의 티끌 같은 시간의 집적, 시간의 도래 자체가 참 감동적이었다”며 감동은 사건과 드라마가 아닌, 일상으로 왔다고 말했습니다. 흰 모자에 웅크린 열정은 가슴으로, 목소리로 피어났습니다.

    고은씨의 연시집 『상화 시편』은 1974년 만나고 1983년 결혼, 시인의 문학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아내 이상화(64·중앙대 영문과 교수)씨에게 온전히 바치는 노래입니다. 형상화할 수 없는 꽃밭을 상징화한,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 표지부터가 벌써 심상치 않습니다.


                                      『상화 시편-행성의 사랑』.창비 제공.

   시집에는 사랑에 행복해하고, 애달파하며, 사랑을 그리워하고, 사랑으로부터 깨달음을 얻는 ‘한 남자’로서의 고은씨의 모습이 진솔하게 담겨 있습니다. 시집은 병풍 같은 사랑의 풍속화가 됩니다.

   저는 이 시집에서 문학적 완성도가 높은 시가 아닌, 고은 부부 사랑화의 풍경을 주목합니다. 고은씨는 1974년 겨울 아내 이상화로부터 긴 장문의 편지를 받고 사랑을 시작했다고 고백합니다. 편지 글에 꽂힌 사랑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듯합니다. 고은씨는 이날 “상화가 나를 결정해버렸다”고 말했습니다.


1974년 겨울

그녀의 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처음도 끝도 없는 긴 아침 강물의 편지였습니다

황량한 수렛길에서

그것도 옷깃 여미고 읽을 줄도 몰랐습니다 딴전의 술만 마셨습니다(<아내의 편지> 중)


   1983년 5월5일 서울 수유리 안병무씨의 집마당에서 열렸던 고은 부부의 아스라한 결혼식. 잔디 뒤 병풍 같은 느티나무 감나무 단풍나무 상수리나무 후박나무 두런두런 합니다.


신부 어머니 조덕순

신랑 어머니 최점례

주례 함석헌

축시 문익환

축사 이문영 백낙청

축도 문재린

인사말 안병무

사회 리영희

이효재가

미국에서 작곡한 신랑의 시 노래를 들려주었다


…(중략)…


신랑 고은은

신부 이상화는

그곳에서 어서어서 달아났다

한강 기슭 내려다보며

둘이 되었다(<수유리> 중)


   또 고은 부부의 소소한, 그러면서도 너무나 소중한 일상이 고스란히 풍경으로 포개지기도 합니다. 퇴근하는 아내를 자전거로 마중나가는 모습이란. 그리고 자전거를 끌고 타고 가면서 두런두런 얘기하는 부부의 모습이란. 


자전거에

상화를 태우고

상화 남편은 견마 잡혔다

…(중략)…

상화 남편은

장미골 모서리를 돌 때

오늘 쓴 시 이야기를 한다

상화는 누이인 듯 누나인 듯

상화 남편의 서투른 이야기를 듣는다

자전거 바큇살에 끼인 풀이 떨어져나갔다(<자전거> 부문)


   또 아내가 임신 했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고은씨는 2층에서 원고지 열장을 쓰다가 내려와 아내의 배를 만지곤 했다고 합니다. 다시 2층으로 올라가 원고지 열장을 쓴 뒤 또 내려와 아내의 배를 만집니다. 이렇게 하기를 10여회. 원고지는 100매를 훌쩍 넘어섭니다.


나는 겨우 원고지 열장 쓰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내려와 아내를 본다

2층으로 올라가

또 열장을 쓰고 내려와

아내의 배를 만져본다

아내의 뱃속을 밤 지새우는 바닷속 아기를 만나본다

하루 백 장이면 열 번을 내려온다(<임신> 중에서)


   그런데 또 천하의 고은씨가 아내에게 꾸중을 듣고 쩔쩔 매는 모습에 어찌나 웃음이 나는지요. 아내에게 지청구를 듣고선 술맛조차 잃은 모습이란. 오숨 마저 숨죽여버리는 그 범인의 모습조차 사랑이었습니다. 


네가 화낼 때

나는 사흘이나 나흘이나 죽어버린다

밥맛 없이

밥 먹는다

술도 물이 된다

네가 화낼 때

몇달 만에 화낼 때 손가락으로 식탁을 똑똑 두드릴 때

이 세상 전체 캄캄하다

숨 죽인다


도망갈 데 없다


장자 남화경에도

숨을 데 없다


아무도 모르리라

화장실에서

내 오줌도 바로 숨죽인다(<네가 화낼 때> 전문)


   그리고 세월이 흐른 어느 금요일 저녁. 고은 부부는 버스를 타고 함께 안성으로 돌아가면서 마침내 삶을 넘어서는 서늘한 사랑을 확인합니다. 죽음조차 넘어선, 그래서 오히려 현실에서 빛나는.


아내는 신중하디신중하게 입을 연다 그 말이 나오다 만다

죽어서 함께 있어요

이렇게 함께 있어요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튼다

삶의 다음에 삶은 없다


…(중략)…


나는 입속에서 답한다


맞아

맞아

이데아는 없어!

이데아는 만년의 가설이야!(<귀로> 중)


   고은씨는 아내는 자신의 인생에서 담임 선생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말합니다. 시가 진실인가에 대해 회의할 때, 후회와 무효를 생각할 때, 다시 후회가 진실의 가장자리였던가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진실을 하나씩 가르쳐줬다는 것이죠. 고은씨는 그래서 “결혼 이후 나온 시의 절반은 상화가 했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내 시라는 것이 진실이었던가

얼마나 내 시라는 것이 거짓이었던가

얼마나 내 떠돌이 날들의 밤하늘

그 잠들 줄 모르는 행각이

거짓투성이 그 비탈이었던가


오, 후회의 무효여

얼마나 내 후회가 진실의 그 가장자리였던가


이쯤이었다

이쯤이었다


밤 이슥히 돌아온

밀물 위

뱃고동소리


다 받아들여

진실을 아늑자늑 가르쳐준 사람


…(중략)…


운명의 여름 가을 상화(<담임>중에서)


   고은씨는 그래서 아내 이상화에 대해 아내를 ‘명사도 동사도 아닌, 허사’라고 주장합니다. “여기 있어도/ 어디에 있나”라는 마음이 일 정도로 언제나 또 찾아진다는 의미이겠죠. 


상화는 명사가 아니다

동사이다

펄펄 살아

여기에 있지 않고

저기에 있나

저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나


아니 어디에 있나


나에게 상화는 명사도 동사도 아니다


어디에 있나

어디에 있나


아, 나에게

상화는 허사이다

불러도

불러도 

그가 없다


못 견디는 것이

견디는 것

방황이

방황이 끝나는 것


왜 나는 배고픈가

왜 목이 마른가

아, 상화는 어디에 있나


여기 있어도

여기 있어도

어디에 있나(<허사> 전문)


   고은씨는 “진정한 사(私)는 인류의 진실과 선, 아름다움의 출발점이며 사를 존중해야만 우리가 지향하는 공(公)도 모독당하지 않는다”며 “이 시집에는 다른 연인을 위한 가능성도 스며있기에 우리 둘만의 사사로운 시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젊은 부부들에 대한 조언을 부탁하자 그는 “교훈은 증오하지만, 친구로선 얘기할 수 있겠다”며 “서로 사랑하기보다 서로 존경하고 섬기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은 부문은 서정주, 보르헤스 등 국내외 유명시인이나 문단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시 속에서 언뜻 언뜻 스쳐가는, 정면이 아닌 측면의 풍경이었지만, 오히려 감흥은 더 끓어올랐습니다. 최정호의 서울 반포아트에 서정주와 한창기, 고은 부부가 가진 저녁과 술자리 풍경에서 서정주의 모습.


바야흐로 서정주의 주정이 시작된다

깐죽깐죽

한창기를 못살게 군다


자네는 왜 그렇게

하관이 쪽 빠져버렸나

자네는 아조아조 궁상이로군 천하궁상이로군(<어떤 술주정> 중)


   또 1960년대 후반, 지금은 작고한 서울대 교수 김현이 당시 학계에서 성가를 드높이던 구조주의를 말하자 고은은 술을 받으라고 대응하던 시절의 아스라한 기억도 한 폭.


1960년대 후반

김현이 슬쩍 구조주의를 말하면

내 앞에서 구조를 말하지 마

나는 실존이야

자, 실존의 술 받어라고 소리쳤다(<지각타령> 중)


   아울러 혼자가 된 보르헤스의 부인 고다마 보르헤스와의 만남도 재밌습니다. 파리 세느강을 부부가 함께 걷던 기억을 회상하며 다음 세상에서도 보르헤스를 만나겠다는 고은씨의 말에 보르헤스 부인은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장면이 재밌습니다.


내가 그녀한테 불가의 속담을 말하자

스치는 옷소매 인연도

삼생 인연이라는 것

하물며

이 세상의 부부 인연

오백번 이상이나 부부 인연 이후라는 것

다음 세상에서도

위대한 보르헤스를 만나시겠다 말하자

안 만날래요

안 만날래요 하고

단호히 말했을 때

나는 웃었다

내 아내도 웃었다

그녀도 멋쩍게 웃었다(<꼬르도바에서> 중)


                                                         『내 변방은 어디 갔나』. 창비 제공

   고은씨는 이번에 이와 함께 신작시집 『내 변방은 어디 갔나』(창비시선 332)도 펴냈습니다. 『허공』(2008) 이후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써온 114편의 신작시를 모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 신작 시집에서 ‘변방’의 시선과 목소리로 중심의 문명을 일갈합니다. 나이도 막지 못하는 도저한 시정신이 활연합니다.

 

<참고문헌>

고은(2011). 『상화 시편-행성의 사랑』. 파주: 창비.

고은(2011). 『내 변방은 어디 갔나』. 파주: 창비.

Posted by 김용출(KIM, YONG CH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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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3.15 14: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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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2.03.21 18: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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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2.03.27 16: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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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2.04.05 1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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