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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26 인생의 오후 5시와 가을-도종환의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인생의 오후 5시와 가을-도종환의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도종환씨의 10번째 시집 표지. 창비 제공(이하 동일)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서)


    『접시꽃 당신』의 시인 도종환(57)씨가 5년 만에 펴낸 열번째 시집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창비 펴냄)에서 자신의 인생 시간을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 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생에서 오후 5시는 ‘질풍노도’의 낮 12시와 오후 1시 사이를 온전히 기억하면서도, 아직 시간이 있음을 감사할 수도 있고 찬란한 황혼을 생각할 수도 있는 성찰의 시간쯤 되겠지요.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중)



   1980년 광주항쟁을 계기로 교육운동과 민족문학운동을 펼쳐온 도종환씨는 이번 시집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서도 우리 사회의 모순과 현대 문명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카이스트>에선 젖은 꽃잎 비에 다시 젖으며/ 수직으로 떨어져내렸다“며 학생들이 잇따라 자살하게 만드는 현실을 비판하고, <사막>에서는 서로가 가시가 되는 세태와 문명을 꼬집습니다.


마른 바람이 모래언덕을 끌고 대륙을 건너는

타클라마칸 그곳만 사막이 아니다

황무지가 끝없이 이어지는 시대도 사막이다

저마다 마음을 두껍고 둔탁하게 바꾸고

여리고 어린 잎들도 마침내 가시가 되어

견디는 일 말고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곳

그곳이 사막이다

우리 안에도 선인장 가시 같은 것이 자라나

여차하면 남을 찌르고 내게 날카로워지는데

뜨거움은 있으나 서늘한 숨결은 없지 않는가

오직 전속력으로 그곳을 벗어나고자 하는 곳

연민도 눈물도 없이 사는 이곳이 사막 아닌가

눈 줄 데는 없는 황량한 메마른 풍경 속에서

모두 다 카우보이가 되어버린(<사막> 전문)


   하지만 이번 시집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자신의 여러 인생 굴곡을 찬찬히 반추하는 부문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는 1980년 광주항쟁 당시 군인 신분으로 언덕에서 M16소총 가늠자를 들여다보며 광주시민군이 다가오기를 기다린 경험 이후 시대와 정면으로 맞서왔습니다. ‘분단시대’ 동인 결성과 민족문학운동, 아내의 죽음, 해직과 구속과 복직 등. 또 심신피로로 쓰러진 뒤 교직을 그만두고 속리산에서 칩거하기도 했지요. 그야말로 온갖 시대와 세월의 풍상을 겪어서 이 자리에 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남아있다는 점에서 인생의 계절로 본다면 가을 오후쯤 될 터.


고개를 넘어오니

가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흙빛 산벚나무 이파리를 따서

골짜기물에 던지며

서 있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느냐는 내 말에

가을은 시든 국화빛 얼굴을 하고

입가로만 살짝 웃었다

웃는 낯빛이 쓸쓸하여

풍경은 안단테 안단테로 울고

나는 가만히 가을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서늘해진 손으로 내 볼을 만지다

내 품에 머리를 기대오는 가을의 어깨 위에

나는 들고 있던 겉옷을 덮어주었다

쓸쓸해지면 마음이 선해진다는 걸

나도 알고 가을도 알고 있었다

늦은 가을 오후(<가을 오후> 전문)


   그래서 이번 시집은 은은합니다. 세상에서, 우주에서, 인생에서, 삶에서, 그리고 시에서조차 은은합니다. 질풍노도의 분노를 우뚝 넘어서고, 죽음 앞에 이른 절망 또한 아직 이른 풍경.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아련한 향기가 스미어 있다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살구꽃 위에 내린

맑고 환한 빛이 들어 있다

강물도 저녁햇살을 안고 천천히 내려갈 땐

은은하게 몸을 움직인다

달빛도 벌레를 채워주는 나뭇잎 위를 건너갈 땐

은은한 걸음으로 간다

은은한 것들 아래서는 짐승도 순한 얼굴로 돌아온다

봄에 피는 꽃 중에는 은은한 꽃들이 많다

은은함이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꽃길을 따라

우리의 남은 생도 그런 빛깔로 흘러갈 수 있다면

사랑하는 이의 손 잡고 은은하게 물들어갈 수 있다면(<은은함에 대하여> 전문)


   물론 인생의 오후 5시쯤, 가을 오후라고 해서 과거가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마중물이 되는 것이니까요. 마치 비에 젖어도 향기를 뿜는 라일락꽃처럼. 그렇다고 미래가 벌써 현실을 대치하지도 않아야겠지요.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

출렁 허리가 휘는

꽃의 오후


꽃은 하루종일 비에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빗물에 연보라 여린 빛이

창백하게 흘러내릴 듯

순한 얼굴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도종환씨는 인생의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 가을 오후쯤에 서서 예순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자연이 펼쳐집니다. 정오의 강렬한 태양도 아니요, 여름 거센 태풍이 아닌. 큰 바람이 지나갔지만, 이제는 자잘한 바람에 흔들리는 ‘풍치의 나날’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이를 빼고 치과를 나서니 스산한 바람이 분다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걸 그동안 몰랐다

아니 통증을 전하는 방식으로 여러 차례

알려왔으나 애써 무시하며 지냈다

이런 일 여러번 겪오본 아내는

바람이 사소하게 불어도 흔들릴 풍치의 나날과

둘 다 연금도 퇴직금도 없이 견뎌야 할 불안한

노후가 벌써부터 걱정이다

허전해지는 삶의 한 모서리 사리물고

초가을에서 깊은 가을로 돌아오는 길

웅송그리며 서 있는 과꽃 몇송이가 보인가

이파리 몇 개는 벌레 먹고 군데군데 구멍이 났는데도

자줏빛 꽃 곱게 피우고 있는 게 예쁘다(<발치(拔齒)> 전문)


    그는 인생의 오후 5시쯤 가을 오후쯤 되면 스스로 처음이, 성채가, 신이 되겠다는 치기를 넘어, 나무 하나로 숲의 일부가 되는 것이 기쁨임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고 노래하는 듯합니다. 다음의 시가 서늘하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발자국

아, 저 발자국

저렇게 푹푹 파이는 발자국을 남기며

나를 지나간 사람이 있었지(<발자국> 전문)

  

    도종환씨는 2008~2009년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맡아 집필실인 충북 보은의 구구산방과 서울을 오가기도 했습니다. 아마 때로는 막차를 잡아타고 가면서 총총한 별 하나 되기를 꿈꾸기도 했을 것입니다. 괜찮다고, 네 편이라고 이마 씻어주는.


흐린 차창 밖으로 별 하나가 따라온다

참 오래되었다 저 별이 내 주위를 맴돈 지

돌아보면 문득 저 별이 있다

내가 별을 떠날 때도 있어도

별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저 별처럼 있고 싶다

상처받고 돌아오는 밤길

돌아보면 문득 거기 있는 별 하나

괜찮다고 나는 네 편이라고

이마를 씻어주는 별 하나

이만치의 거리에서 손 흔들어주는

따뜻한 눈빛으로 있고 싶다(<별 하나> 전문)


   오늘도 바람이 휘감은 꽃, 비에 젖은 한송이 꽃을 보면서 찬란한 황혼, 총총히 빛나는 별을 꿈꾸는 도종환씨의 겨울이 벌써 궁금합니다. 그때 하늘의 별은, 땅위의 꽃은 누구의 별이고 꽃입니까.



<참고문헌>

도종환(2011).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파주: 창비.

Posted by 김용출(KIM, YONG CH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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