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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8.01 대시인의 사랑과 문인 편린-고은의 『상화시편』 (4)

 대시인의 사랑과 문인 편린-고은의 『상화시편』

   할 수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할 수 있었음에도 안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시 20대에 사랑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30대에도 사랑보다 허무가, 죽음이 먼저 왔다고 회고합니다. 시대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요, 자신의 삶의 굴곡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스무살의 사랑 내 것이 아니었다

소월이나 네루다의 것이었다

스무살도

서른살도

사랑보다

허무가

허무에 앞서

죽음이 내 것이었다


…(중략)… 


식민지 36년의 굶주림 끝

나 자신의 학대

분단 몇십년의 만취 끝

나 자신의 저주

사랑은 너무 늦게 내 몸에 박힌 화살들이었다(<지각> 중에서)


 시인 고은씨는 53년 문학인생 처음으로 펴낸 사랑시집 『상화 시편-행성의 사랑』에서 “여기 있어도/ 어디에 있나”라며 아내를 ‘명사도 동사도 아닌, 허사’라고 노래합니다. 창비 제공.

   노벨문학상 후보에 꾸준히 오르내리는 시인 고은(78)씨의 얘기입니다. 이런 고은 시인이 1953년 문학인생 처음으로 사랑시집 『상화 시편-행성의 사랑』(창비)을 펴냈습니다. 지난해 완간된 『만인보』(전 30권) 등 수많은 시를 써왔지만, 고은씨가 사랑을 정면으로 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생애 첫 연시집을 펴낸 이유를 그는 지난 7월6일 이렇게 밝혔습니다.

   “인류 보편적 가치인 사랑, 이것을 세상에 내보이는 만용(蠻勇)을 용기로 삼았습니다. 한 인간이 한 인간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받는 감동을 억제할 수 없어 이렇게 됐어요.”

    고은 시인은 이날 서울 무교동 한 식당에서 막걸리를 한 잔 걸친 뒤 기자들에게 “아내와 한 30년 살면서 사소한 일상의 티끌 같은 시간의 집적, 시간의 도래 자체가 참 감동적이었다”며 감동은 사건과 드라마가 아닌, 일상으로 왔다고 말했습니다. 흰 모자에 웅크린 열정은 가슴으로, 목소리로 피어났습니다.

    고은씨의 연시집 『상화 시편』은 1974년 만나고 1983년 결혼, 시인의 문학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아내 이상화(64·중앙대 영문과 교수)씨에게 온전히 바치는 노래입니다. 형상화할 수 없는 꽃밭을 상징화한,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 표지부터가 벌써 심상치 않습니다.


                                      『상화 시편-행성의 사랑』.창비 제공.

   시집에는 사랑에 행복해하고, 애달파하며, 사랑을 그리워하고, 사랑으로부터 깨달음을 얻는 ‘한 남자’로서의 고은씨의 모습이 진솔하게 담겨 있습니다. 시집은 병풍 같은 사랑의 풍속화가 됩니다.

   저는 이 시집에서 문학적 완성도가 높은 시가 아닌, 고은 부부 사랑화의 풍경을 주목합니다. 고은씨는 1974년 겨울 아내 이상화로부터 긴 장문의 편지를 받고 사랑을 시작했다고 고백합니다. 편지 글에 꽂힌 사랑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듯합니다. 고은씨는 이날 “상화가 나를 결정해버렸다”고 말했습니다.


1974년 겨울

그녀의 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처음도 끝도 없는 긴 아침 강물의 편지였습니다

황량한 수렛길에서

그것도 옷깃 여미고 읽을 줄도 몰랐습니다 딴전의 술만 마셨습니다(<아내의 편지> 중)


   1983년 5월5일 서울 수유리 안병무씨의 집마당에서 열렸던 고은 부부의 아스라한 결혼식. 잔디 뒤 병풍 같은 느티나무 감나무 단풍나무 상수리나무 후박나무 두런두런 합니다.


신부 어머니 조덕순

신랑 어머니 최점례

주례 함석헌

축시 문익환

축사 이문영 백낙청

축도 문재린

인사말 안병무

사회 리영희

이효재가

미국에서 작곡한 신랑의 시 노래를 들려주었다


…(중략)…


신랑 고은은

신부 이상화는

그곳에서 어서어서 달아났다

한강 기슭 내려다보며

둘이 되었다(<수유리> 중)


   또 고은 부부의 소소한, 그러면서도 너무나 소중한 일상이 고스란히 풍경으로 포개지기도 합니다. 퇴근하는 아내를 자전거로 마중나가는 모습이란. 그리고 자전거를 끌고 타고 가면서 두런두런 얘기하는 부부의 모습이란. 


자전거에

상화를 태우고

상화 남편은 견마 잡혔다

…(중략)…

상화 남편은

장미골 모서리를 돌 때

오늘 쓴 시 이야기를 한다

상화는 누이인 듯 누나인 듯

상화 남편의 서투른 이야기를 듣는다

자전거 바큇살에 끼인 풀이 떨어져나갔다(<자전거> 부문)


   또 아내가 임신 했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고은씨는 2층에서 원고지 열장을 쓰다가 내려와 아내의 배를 만지곤 했다고 합니다. 다시 2층으로 올라가 원고지 열장을 쓴 뒤 또 내려와 아내의 배를 만집니다. 이렇게 하기를 10여회. 원고지는 100매를 훌쩍 넘어섭니다.


나는 겨우 원고지 열장 쓰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내려와 아내를 본다

2층으로 올라가

또 열장을 쓰고 내려와

아내의 배를 만져본다

아내의 뱃속을 밤 지새우는 바닷속 아기를 만나본다

하루 백 장이면 열 번을 내려온다(<임신> 중에서)


   그런데 또 천하의 고은씨가 아내에게 꾸중을 듣고 쩔쩔 매는 모습에 어찌나 웃음이 나는지요. 아내에게 지청구를 듣고선 술맛조차 잃은 모습이란. 오숨 마저 숨죽여버리는 그 범인의 모습조차 사랑이었습니다. 


네가 화낼 때

나는 사흘이나 나흘이나 죽어버린다

밥맛 없이

밥 먹는다

술도 물이 된다

네가 화낼 때

몇달 만에 화낼 때 손가락으로 식탁을 똑똑 두드릴 때

이 세상 전체 캄캄하다

숨 죽인다


도망갈 데 없다


장자 남화경에도

숨을 데 없다


아무도 모르리라

화장실에서

내 오줌도 바로 숨죽인다(<네가 화낼 때> 전문)


   그리고 세월이 흐른 어느 금요일 저녁. 고은 부부는 버스를 타고 함께 안성으로 돌아가면서 마침내 삶을 넘어서는 서늘한 사랑을 확인합니다. 죽음조차 넘어선, 그래서 오히려 현실에서 빛나는.


아내는 신중하디신중하게 입을 연다 그 말이 나오다 만다

죽어서 함께 있어요

이렇게 함께 있어요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튼다

삶의 다음에 삶은 없다


…(중략)…


나는 입속에서 답한다


맞아

맞아

이데아는 없어!

이데아는 만년의 가설이야!(<귀로> 중)


   고은씨는 아내는 자신의 인생에서 담임 선생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말합니다. 시가 진실인가에 대해 회의할 때, 후회와 무효를 생각할 때, 다시 후회가 진실의 가장자리였던가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진실을 하나씩 가르쳐줬다는 것이죠. 고은씨는 그래서 “결혼 이후 나온 시의 절반은 상화가 했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내 시라는 것이 진실이었던가

얼마나 내 시라는 것이 거짓이었던가

얼마나 내 떠돌이 날들의 밤하늘

그 잠들 줄 모르는 행각이

거짓투성이 그 비탈이었던가


오, 후회의 무효여

얼마나 내 후회가 진실의 그 가장자리였던가


이쯤이었다

이쯤이었다


밤 이슥히 돌아온

밀물 위

뱃고동소리


다 받아들여

진실을 아늑자늑 가르쳐준 사람


…(중략)…


운명의 여름 가을 상화(<담임>중에서)


   고은씨는 그래서 아내 이상화에 대해 아내를 ‘명사도 동사도 아닌, 허사’라고 주장합니다. “여기 있어도/ 어디에 있나”라는 마음이 일 정도로 언제나 또 찾아진다는 의미이겠죠. 


상화는 명사가 아니다

동사이다

펄펄 살아

여기에 있지 않고

저기에 있나

저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나


아니 어디에 있나


나에게 상화는 명사도 동사도 아니다


어디에 있나

어디에 있나


아, 나에게

상화는 허사이다

불러도

불러도 

그가 없다


못 견디는 것이

견디는 것

방황이

방황이 끝나는 것


왜 나는 배고픈가

왜 목이 마른가

아, 상화는 어디에 있나


여기 있어도

여기 있어도

어디에 있나(<허사> 전문)


   고은씨는 “진정한 사(私)는 인류의 진실과 선, 아름다움의 출발점이며 사를 존중해야만 우리가 지향하는 공(公)도 모독당하지 않는다”며 “이 시집에는 다른 연인을 위한 가능성도 스며있기에 우리 둘만의 사사로운 시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젊은 부부들에 대한 조언을 부탁하자 그는 “교훈은 증오하지만, 친구로선 얘기할 수 있겠다”며 “서로 사랑하기보다 서로 존경하고 섬기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은 부문은 서정주, 보르헤스 등 국내외 유명시인이나 문단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시 속에서 언뜻 언뜻 스쳐가는, 정면이 아닌 측면의 풍경이었지만, 오히려 감흥은 더 끓어올랐습니다. 최정호의 서울 반포아트에 서정주와 한창기, 고은 부부가 가진 저녁과 술자리 풍경에서 서정주의 모습.


바야흐로 서정주의 주정이 시작된다

깐죽깐죽

한창기를 못살게 군다


자네는 왜 그렇게

하관이 쪽 빠져버렸나

자네는 아조아조 궁상이로군 천하궁상이로군(<어떤 술주정> 중)


   또 1960년대 후반, 지금은 작고한 서울대 교수 김현이 당시 학계에서 성가를 드높이던 구조주의를 말하자 고은은 술을 받으라고 대응하던 시절의 아스라한 기억도 한 폭.


1960년대 후반

김현이 슬쩍 구조주의를 말하면

내 앞에서 구조를 말하지 마

나는 실존이야

자, 실존의 술 받어라고 소리쳤다(<지각타령> 중)


   아울러 혼자가 된 보르헤스의 부인 고다마 보르헤스와의 만남도 재밌습니다. 파리 세느강을 부부가 함께 걷던 기억을 회상하며 다음 세상에서도 보르헤스를 만나겠다는 고은씨의 말에 보르헤스 부인은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장면이 재밌습니다.


내가 그녀한테 불가의 속담을 말하자

스치는 옷소매 인연도

삼생 인연이라는 것

하물며

이 세상의 부부 인연

오백번 이상이나 부부 인연 이후라는 것

다음 세상에서도

위대한 보르헤스를 만나시겠다 말하자

안 만날래요

안 만날래요 하고

단호히 말했을 때

나는 웃었다

내 아내도 웃었다

그녀도 멋쩍게 웃었다(<꼬르도바에서> 중)


                                                         『내 변방은 어디 갔나』. 창비 제공

   고은씨는 이번에 이와 함께 신작시집 『내 변방은 어디 갔나』(창비시선 332)도 펴냈습니다. 『허공』(2008) 이후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써온 114편의 신작시를 모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 신작 시집에서 ‘변방’의 시선과 목소리로 중심의 문명을 일갈합니다. 나이도 막지 못하는 도저한 시정신이 활연합니다.

 

<참고문헌>

고은(2011). 『상화 시편-행성의 사랑』. 파주: 창비.

고은(2011). 『내 변방은 어디 갔나』. 파주: 창비.

Posted by 김용출(KIM, YONG CH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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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3.15 14: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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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2.03.21 18: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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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2.03.27 16: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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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2.04.05 1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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